본문 바로가기
뉴스

레판토해전 [Battle of Lepanto]

by trueself 2008. 2. 7.
레판토해전 [Battle of Lepanto] - 신성동맹()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해전.

*Background

1293년 쇠퇴한 셀주크 투르크(Seljuks Turks)는 13세기 푸른 늑대 칭기스 칸(Khan Genghis)이 이끄는 대몽골 기병에 의해 Turkic인들의 땅에서 서쪽으로 쫓겨와 오늘날의 터키(Turkey)인 Anatolia에 머물러 피빛 붉은 깃발에 그들의 입술과 같은 초승달을 그렸다.이후 Turkic인들은 날로 강성해져갔고 오스만(Osman)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건설되었다. 이무렵 이탈리아 반도의 공화국들은 이에 저항하고자 로마교황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로인해 크리스찬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은 오스만과 전시에 들어갔지만 오스만은 소아시아를 비롯한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 연안까지 잠식해 가게 된다.곧이어 비엔나(Vienna)에도 초승달 깃발이 나타났고, 말타(Malta)의 크리스찬들까지도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이슬람교국 오스만의 행군은 기독교국과의 전쟁이 불가학력적인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오스만의 후계자 Ohkran은 서부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1354년에는 갈리폴리(Gallipoli)를 함락시킨다. 이어 Murad 1세는 비잔틴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감행했고 1361년 Adrianople을 함락시키고, 1389년 코소보(Kossovo)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더욱더 새력을 넓혀 Danube에 까지 이른다. 기독교국의 패배에 이어 코소보에서의 대패를 거듭한 비잔틴제국은 날로 좁아져 갈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강성해진 유럽의 영향력에 잠시 주춤하였지만, 1444년 Varna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패하게 되고 베니스(Venice)만을 겨우 지킬 뿐이었다. 정복자 회교도인들에 의해 크리스찬들은 전향되어 그들의 보병으로 양성되었고, 16세기 접어들어 강성한 오스만 제국은 세명의 술탄(Sultans) Bayezid II, Selim I, 그리고 Suleyman 지배하게 된다.



이들중 Selim 왕은 군사를 남동부로 향하게 하여 시리아(Syria)를 비롯한 이라크(Iraq), 이집트(Egypt), 아라비아(Arabia)를 점령했고, Bayezid II 세는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흑해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주요 항해 거점인 지중해에게 까지 오스만 함대를 주둔 시킨다.



메카(Mecca) 역시 이때 당시 오스만의 술탄 세력에 흡수 되었으며, 슐레이만(Suleyman)은 이 두 전임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521년 Belgrade에 거대한 요새를 설립한다.1526년 헝가리(Hungarians)가 점령되고 그들을 저지 할 마지막 방어선은 오스트리아인들(Austrian)에게 달려있었다. 1529년 슐레이만은 다시 비엔나의 수도를 공격하여 약탈했고 기독교국들에게 철수를 강요했다.



한편, 오스만제국의 해군은 코르세르(Corsair)들과 함께 알제리(Algiers)를 점령했고, 다시 트리폴리(Tripoli)를 공격하여 1565년에 그들의 해군력은 181척의 함대와 30,000명의 해군을 자랑하는 과히 무적의 해군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늦은봄 오스만의 전 해군은 Malta로 공격을 감행했고 이를 저지하고자 St. John 기사단이 출동했다. 600명의 기사들과 8,000명의 기독교국 해군이 오스만 해군에 대항하였고, 그들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의 해군은 무적의 해군이 아님을 기독교국은 보여 주었고 Malta기사단의 승리로 지중해는 아직도 기독교의 영역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비록 Venice는 위태로웠지만 로마 교황 Pope Pius V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게 된다.



때를 같이 하여 오스만 제국을 대항한 동맹국이 형성 되었다. 교황령(Papal States)을 주축으로 베니스, 제노바(Genoa), 에스파니아(Spain)였다. 그것은 주로 해상 동맹이었으며, 이들 동맹을 지휘한 사람은 오스트리아(Austria)의 돈 후안(Don Joan)이었다.



*Charge



오스트리아의 Don John이 지휘하는 300여척의 함대는 로마 교황이 지원해준 막대한 군자금과 그의 의형제인 에스파니아의 필립 2세(Philip II)가 지원해준 80척의 갤리선과 22척의 Frigate, Brigantine, Galleon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비록 24살 이었지만, 무어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미 에스파니아 해군을 지휘했던 경력이 있는 유능한 해군 사령관이었다.



에스파니아의 정예군 100명과 30,000여명의 해군이 레판토 해전에 대비하여 집결했으며, 다음으로 대부분의 베니스의 병사들이 포함되었고, 또한 그에게는 지중해에서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6척의 베네치안(Venetian) 갤리어스(Galleasses) 역시 함대에 있었다.



베니치안 갤리어스는 넓은 선폭 덕분에 높은 파도에도 거침없는 항해를 했으며, 선수와 선미의 탑에 장착된 강력한 선회포들과 측면에 둘러싸인 두꺼운 목재들로 노 젓는 선원들을 보호했기 때문에 300년동안이나 지중해에서는 무적의 함선으로 군림했다.하지만 갤리선의 장점이자 단점인 노 때문에 해군병력이 30,000명인데 반해 노젓는 인부는 무려 50,000명에 달하여 총병력은 80,000명에 달했다.



1571년 8월 25일 시칠리에 집결한 연합 함대는 갤리선 208척, 베네치안 갤리어스 6척, 갤리온 26척, 프리게이트와 브리간틴선 76척으로 모두 316척에 까지 이르렀다. 돈 후안은 세바스찬 베니에로(Sebastian Venierro)가 지휘하는 갤리선 106척, 베네치안 갤리어스6척, 갤리온 2척, 프리게이트 20척과,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지휘하는 Genoese함대는 90척의 갤리선, 갤리온등 24척, 브리간틴 50척, 그리고 교황령 함대는 안토니오 콜로나(Antonio Colonna)가 지휘하는 갤리선 12척과 프리게이트 6척으로 함대를 3등분 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니아의 왕과 베니스와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베니스의 해군 사령관 베니에로는 지휘권을 박탈 당한다.1571년 9월 17일 Don John의 함대가 지중해 동부로 향하기 위한 보급과 만반의 준비를 갖출 무렵, 끔찍한 소식이 전해져 온다. 크리스찬들이 거주하는 Cephalonia가 터키에 의해 함락 되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국의 마지막 방어요새였던 그곳에서 살아남은 병사들과 주민들은 무참히 고문당하고 살육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더욱더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것은 터키의 해군 사령관 알리 파샤(Ali Pasha)의 산하에 있던 악명높은 코르세르 해적 우두머리 우르크 알리(Uluch Ali)에 의해 카리브의 회교도 어부들까지 동참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Don John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회교도들에 대한 공격을 서두르게 된다.



*The Naval Battle of Lepanto



3백여척의 배가 쉬지 않고 노를 젓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Don Joan)과 베니스의 동맹국들로 구성된 최강의 해군은 타오르는 아침 햇살 아래 오스만 투르크와 최후의 접전을 치르기 위한 항해를 계속 해 나가고 있었다.



투르크족 군사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점령지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까지 점령하여 제국을 확장시켰지만 헝가리의 굳건한 방어에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꺾이지 않은 투르크족은 지중해로 관심을 돌려 베니스와 스페인의 해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갤리선 230척과 베네치안 갤리아스선 6척이 투르크 해군의 갤리선 270척과 접전을 벌이기 위해 줄을 지어 레판토만으로 이동했다. 전함들은 8KM 간격을 두고 멈추어 섰다. 화살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고 노젓는 둔탁한 소리가 마침내 우뢰 같은 포성에 파묻혀 버렸다.



10월 6일 그에게는 운이 좋게도 동풍을 등에 지고 Don John의 함대는 터키의 함대가 기다리고 있는 레판토 만으로 이동을 개시 했다. 역시 터키의 해군 사령관 알리 파샤가 지휘하는 함대는 Patras만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구 역사상 그 어디에도 전래가 없었던 가장 많고 거대한 함대들이 해전을 위해 이동중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안 갤리어스의 선상에는 해전을 준비한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고, 적에게 치명타를 앉겨다줄 선회포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3개의 함대로 나뉘어진 돈 후안의 함대가 터키의 함대에 발견되고, 그의 3 함대중 64척은 돈 후안이 직접 중앙을, 좌익을 Barbarrigo가 지휘하는 갤리선 53척이,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지휘하는 Genoese함대 54척의 갤리선은 우익을, 갤리선 30척은 예비부대로 Santa Cruz에 의해 지휘되고, 갤리어스는 중앙과 좌익앞에 각각 2척씩, 나머지 2척은 우익과 후위 전대 사이에 배치 시켰다.



한편 무어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으로 구성된 터키의 함대는 갤리선 210척, 겔리온 40척, 경갤리 20척과 7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알리 파샤가 중앙에 우익은 마호메트 샤르크(Mahomet Sirocco)가 좌익은 우르크 알리에게 지휘하게 하였다. 10월 7일 레판토 만에 집결한 갤리선 95척으로 구성된 중앙전대는 알리 파샤가 직접 지휘하였고, 갤리선 93척으로 구성된 좌익 전대는 우르크 알리가, 그리고 갤리선 54척으로 구성된 우익 전대는 마호메트 샤르크가 각각 지휘하였다.



돈 후안은 무슬림의 함대가 발포하기 전까지 발사를 하지 않고 갤리어스가 먼저 선수 충각을 이용하여 적함대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돌진하도록 했다. 이에 터키의 함대도 3함대로 분산 대응하게 되었고, 돈 후안은 재빨리 알리 파샤가 이끄는 기함으로 향하면서 2척의 갤리어스 측면의 거대한 캐논포를 발사하여 순식간에 터키의 갤리선 7척을 격침시킨다.



알리 파샤의 함대는 곧장 기독교국 함대로 근접하여 접근전을 벌이려 하였으나, 대기하고 있던 에스파니아 정예 보병들이 이에 맞서 교전에 응했다. 돈 후안은 그 즉시 알리 파샤의 기함으로 배를 붙여 보병으로 공격하게끔 명령했고, 난투극이 벌어진다. 선상은 피로 물들고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가 울부 짖는다. 에스파니아의 정예 보병들은 곧장 돌격하며 터키 해군을 무찔러 나갔고 얼마지 않아 터키의 해군 사령관인 알 파샤의 목이 베어진다.



알 파샤의 목은 긴 장창위에 꿰어져 돈 후안의 기함 Main Mast 꼭대기에 걸려졌다. 이에 기독교국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Barbarrigo의 베네치안 갤리어스 함대와 Andrea Doria의 함대는 측면에서 함포를 발사하며 포위해 들어갔다.



이를 눈치챈 터키의 우르크 알리와 샤르크의함대 8척은 남쪽으로 선회하며 Barbarrigo의 기함을 포위한다. 포위당한 Barbarrigo는 터키함선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되고, 곧이어 구조를 위해 다가온 Doria의 갤리선에 의해 나포되었던 기함을 되찾는데 성공하여 그즉시 샤르크를 잡아 목을 베어 버린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우르크 알리였지만, 전세가 불리함을 느끼고는 전함대 퇴각령을 내리고 레판토를 떠난다. 돈 후안의 함대는 재정비에 들어갔고, 도리아의 함대는 퇴각하는 우르크 알리를 추격하여 4시간의 추격전 끝에 터키의 함대는 거의 모두를 괴멸 시켰다. 돈 후안이 승리를 확신시킬 무렵 고통스러운 패배를 안고 우르크 알리는 25,000명 이상의 전사자들을 남긴채 알제리로 도망갔고, 터키의 무적 갤리선 함대는 뿔뿔이 흩어져 물러났다.



투르크는 해전 초반부터 베네치안 갤리어스의 공격에 압도 되어 버린데다가 사령관 알리 파샤가 전사함으로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결국 113척의 함선이 격침되었고, 117척이 나포되어 해군의 거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유럽의 기독교권에서 철수하여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한편, 돈 후안이 이끄는 기독교국 동맹은 8,000여명이 전사했고, 16,000여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위로시켜 주었던 것은 투르크의 갤리선에서 노를 젓던 그리스도교국 노예 12,000여명을 해방 시켜 주었다는 것이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모든 기독교국의 교회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은 영웅이 되었고 그를 따른 수많은 기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웃으며 그의 나라로 귀환했고, 이에 반해 술탄은 울분을 금치 못하고 그의 칼을 뒤로 꺾어야만 했다.레판토 해전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최대규모의 갤리선들 간의 마지막 해전으로 기록 된다.


출처 : http://uncharted.com.ne.kr

반응형